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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2023

기내식 먹는 기분 - 정은

by Arlin 2023. 8. 6.
 
기내식 먹는 기분
2018년 《산책을 듣는 시간》으로 사계절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은 작가가 《커피와 담배》에 이어 산문집 《기내식 먹는 기분》을 펴냈다. 작가는 15년 동안 세계 여러 도시에 한두 달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이어왔지만, 흔히들 하는 ‘외국에서 한 달 살아보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 생이 자신의 삶이 아닌 것 같아 유령처럼 서성이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숨이 막혀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가 돈이 떨어지면 되돌아와 최저 시급 생활자가 되어 돈을 모으고 다시 비행기 티켓을 사는 작가의 이야기는 기존의 ‘여행 에세이’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비행기를 타기 전 설레는 마음으로 기내식을 기다리다가도 막상 먹으면 그 맛에 실망한 경험들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또 기내식을 기대하고 만다. 작가는 ‘기내식 먹는 기분’의 핵심을 비행기가 멈추면 내 삶도 멈춘다는,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라고 설명한다. 기내식을 먹고 나면 살아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지상에 두고 온 고민들은 잊게 된다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을 때마다 비행기 티켓을 사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인도와 미국을 여행하고, 마침내 뿌리를 내리고 살게 해준 서울의 공간에 대한 매혹적인 이야기가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들과 함께 펼쳐진다.
저자
정은
출판
사계절
출판일
2022.11.30

 

 

이 책은 나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책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던 올해(2023년) 2월에 강릉 '한낮의 바다'에서 사 온 책이다. 심지어 랜덤 책이기 때문에 사장님이 포스트잇에 적어놓은 문장만 보고 골라온 책이다.

 

 

포스트잇에 적혀있던 문장이다.

 

 

 

 

 

이 책에는 작가의 산티아고 순례길, 인도, 미국 여행기가 담겨있다. 다른 사람의 여행기가 뭔 재미가 있겠냐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쉽게 갈 수 없는 길을 가보며 느낀 점들이 인상 깊었고, 중간중간에 나도 모르게 '풉'하고 웃음이 새어 나올 때가 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기내식 먹는 기분'이 들었다.

 


 

 

p.35

큰 변화를 겪고 나면 성숙해지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고통은 성숙의 필수 요건이 아니다. 고통은 그저 고통이고, 몸이 힘든 건 힘든 것이고, 사람은 마음을 바꿀 수 있을 때만 성숙한다.

 

p.35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을 때까지 가진 것을 버리다 보면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된다. 무엇을 욕망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지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말해준다.

 

p.39

좋은 하루를 쌓아나가는 게 삶이라는 것, 거창한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를 갈아 넣고 희생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만족스럽게 완성하는 것, 나를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주변을 잘 가꾸는 것, 그리고 운 좋게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산책할 기회가 생긴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순간을 즐기고 고맙게 여기는 것.

 

p.50

몸과 마음이 합해진 것이 내가 아니라 몸은 그저 몸이다. 몸에게 몸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면 몸은 몸의 언어로 의사 표시를 한다. 그런데 마음이 그걸 곡해하면 마음은 그 원인을 몸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 내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면 몸이 힘들어지는 찰나에 나쁜 마음들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p.51

언제나 몸은 자신을 다스릴 줄 안다. 몸의 언어를 듣고 몸이 원하는 대로만 따른다면 오히려 마음을 항상 청정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p.59

나의 언어로 고맙다는 말을 어떻게 하는지 물어본 사람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p.65

혼자 다니는 건 나의 선택이었고 혼자 있는 게 좋은데, 그걸 즐겼는데, 내가 늘 혼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슬픈 사람이 지구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있단 사실에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p.69

힘들었지만 정상에서의 풍경은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힘들었기 때문에 더 아름다웠을 것이다.

 

p.76

그 길에서 얻은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뿐이라고 생각한다. 버릴 수만 있을 뿐 얻을 것은 없다는 것. 만약에 그 길이 누군가를 작가로 만들어주는 게 사실이라면, 그 길이 성스럽고 영험해서가 아니라 버리고 버려서 가벼워진 사람만이 끝까지 걸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p.113

어둠 속에서 해를 기다리다 보면 문득 깨닫게 된다. 해는 항상 어둠 속을 달려와야 한다는 것을. 본인이 빛을 내지 않으면 세상이 온통 어둡다는 거 얼마나 고단한 일일까.

 

p.127

모든 매혹스러운 지점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해서, 그 순간을 공유하지 않은 이에게 매혹을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자주 매혹당하는 이들은 비밀이 점점 많아지고, 비밀이 많은 이들은 갈수록 외로워진다. 그러니 타인의 매혹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자. 그건 애초에 말해질 수 없는 영역에서 생겨나니까.

 

p.169

연인은 거울을 들어주는 사람이고, 내가 나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좋은 사랑은 나 자신을 더 정확히 보게 한다. 서로 거울을 들고 서로를 비춰주는 관계는 두 사람을 다 성장시킨다.

 

p.173

거울로 서로를 비추며 무한히 가깝게 다가가는 두 연인의 이미지를 상상하면 오히려 더 슬퍼진다. 그럴 때 세상에서 가장 숨기 좋은 장소는 거울 뒤인 것 같다.

 

p.174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볼 때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잘 알게 된 두 사람이 마주 선 몸을 돌려 나란히 앞을 보고 각각이 하나의 눈인 듯 두 개의 관점을 가진 한 생명체처럼 움직일 때 더 큰 힘을 갖는다. 그걸 배우기까지 참 많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p.175

나이테가 나무의 나이를 알려주는 것처럼 도시에도 나이테가 있다면, 그건 나무들이 아닐까? 거리의 나이를 알고 싶다면 가로수를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거리가 조성될 시기에 틀림없이 나무가 먼저 심어졌을 테니까.

 

p.184

어쩌면 인간은, 안팎이 뒤집어진 존재가 아닐까? 보드라운 피부를 선택한 대신, 광폭한 자연이 새겨진 얼굴을 속으로 지녀서 광폭한 내면을 갖게 된 게 아닐까? 비바람 속에 나뭇가지들이 서로 문지르며 소리를 낼 때 인간은 서로의 감정을 할퀴어서 상처를 내는데 몰두한다. 굳은살이 새겨진 감정을 획득한 자만이 평화롭게 눈 감는다. 평생 뒤집어진 안팎을 다시 뒤집으려고 노력하다가 땅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마는 존재, 그게 바로 인간이 아닐까.

 

p.223

책방 일이 좋았던 이유는 보통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사람들이 책을 사러 오기 때문이다. 운전을 시작하려는 사람, 영어 공부를 시작하려는 사람, 제빵을 배우려는 사람,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 출산을 하려는 사람, 투자를 배우려는 사람, 그 수많은 시작의 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p.229

함께 있던 기억과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하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지만, 사랑의 대상을 몸으로 감각할 수 없다는 건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p.235

만약에 어떤 공간에서 마음이 편하고 많은 것을 얻어온 기분이 든다면, 그건 그 공간을 지키는 사람이 자신의 것을 나눠줬기 때문이다. 한 공간을 만들고 지킨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나눈다는 마음 없이는 공간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